피프레시 10월 월요시네마
<조커: 폴리 아 되>에 관하여 … <조커>와 비교해서 본, 대중의 변화와 사회적 의미
10월 28일 정병기 영화평론가 발제, 20여 명 가까이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10월 28일 정병기 영화평론가가 토드 필립스(Todd Phillips) 감독의 <조커: 폴리 아 되>(2024)에 대해 발제했다. 이 세미나에는 20여 명 가까이 참여해 약 1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피프레시는 1930년 세계 각국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이며,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발제]
<조커: 폴리 아 되>는 호평과 혹평이 엇갈리는 영화입니다. 이색적인 속편으로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관객을 비롯해 많은 평론가들이 전편에 비해 흥행과 예술성에서 꽤 부족하다고 평가하죠. 필립스 감독은 전편을 의식하지 않고 속편을 찍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이 영화만큼 전편의 내용을 모르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화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속편인 <조커: 폴리 아 되>만을 두고 논평하기보다 전편인 <조커>와 비교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네 가지 지점에서 비교하겠습니다. 첫째,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성, 둘째, 살인의 의미, 셋째, 주인공 심리와 정체성의 변화, 넷째, 주인공과 대중의 관계 혹은 대중의 모습. 사실 이 네 가지는 영화의 흐름과 메시지를 읽는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분과 혼란
첫째, 환상 혹은 망상과 현실의 구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편 <조커>에서는 환상과 망상이 뒤섞여 있다가 뒤편으로 갈수록 분명해져요. 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아서는 카니발이라는 예명을 가진 성공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이웃집 여자 소피(Zazie Beetz)와 사랑하는 환상을 하죠. 어머니는 아서에게 행복하라는 의미에서 ‘해피’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고담시에서 최고의 금융업자이자 성공한 정치 엘리트이기도 한 토마스 웨인(Brett Cullen)의 사생아라는 망상을 심어줘요. 하지만 실제 아서는 아동 학대의 피해자이자 입양아인데다 멸시받고 조롱받는 광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처절히 깨닫고요. 모든 환상이 깨어지고 난 후 그의 예명 카니발은 축제라는 의미의 카니블(carnival)이 아니라 식인하는 사람의 의미인 캐니블(cannibal)이 되고 말아요. 조커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죠.
자신이 존경하던 머레이 프랭클린(Robert De Niro)의 코미디 쇼에 초청받지만 그것도 그를 웃음거리로 소비하려던 것이었어요. 하지만 아서는 이미 어릿광대나 슬픈 광대 혹은 바보광대가 아니라 조커라는 살인광대로 거듭나 있어요. 성공한 코미디언으로서의 카니블 아서 플렉과 엘리트의 사생아라는 것은 환상이자 망상이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아서 플렉은 캐니블을 거쳐 조커로 변한 겁니다.
반면 <조커: 폴리 아 되>에서 환상, 망상, 현실은 뒤섞여 있는데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할리 퀸과 함께 쇼를 하는 뮤지컬 장면은 환상입니다. 아서가 하늘을 보자 흑백 우산이 칼라 우산으로 바뀌듯이 말이에요.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코미디언 조커는 환상이자 망상이라는 얘기예요. 전편에서 소피가 착실한 아서 플렉을 원했다면, 속편에서 할리 퀸, 즉 리 퀸젤은 살인광대로서의 조커를 원해요. 영화의 구성에서도 뮤지컬은 환상만을 표현하지 않고요. 그들은 실제 대화할 때도 가끔 노래로 합니다. 나중에 아서가 리 퀸젤에게 노래가 아니라 말로 해달라고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이 혼란스런 구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대사죠.
전편 <조커>에서 조커로 거듭난 것은 현실을 깨뜨리는 또 다른 현실입니다. 실제 조커가 된 후 아서의 감정실금은 해소된 것처럼 보이죠. 반면,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조커는 지나가는 망상일 뿐 아니라, 이 망상을 부추기는 할리 퀸과 대중들은 조커와 함께 집단 감응정신병에 걸린 망상자들이에요. ‘폴리 아 되’(Folie à Deux)라는 부제가 이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편이 엘리트와 인민으로 구성된 사회 구조에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폭력적으로 타파하는 현상이 생겨나는 원인과 그 파행적 결과를 잘 보여준 영화라면, 속편은 그것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무질서를 초래하는 폭력적 파행은 결국 자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반성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조커는 없다’라는 아서 플렉의 마지막 발언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요.
범죄와 처단, 정신과의사 살해의 배제
둘째, 살인의 의미에 대해 보겠습니다. ‘조커’ 전편에서 아서가 살해한 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에요. 금융회사 직원 세 명, 광대회사 동료 랜든, 어머니, 머레이 프랭클린, 정신과의사, 이렇게 일곱 명이죠. 그런데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재판은 다섯 명의 살인에 대해 이루어지며, 나중에 아서가 한 번을 더 고백해 모두 여섯 명의 살인만 언급돼요. 나중에 고백한 어머니 살해도 분열적 인격인 조커로서의 행위와 연결성이 약하기 때문에 법정 다툼에서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아서의 심경 변화를 더 처절하게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기능하죠.
반면 정신과의사 살해에 대해 속편은 끝까지 입을 다뭅니다. 사실 전편에서도 정신과의사 살해 장면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는데요. 다른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아서가 정신과의사와 상담하고 자리를 뜰 때 그의 발자국이 피로 흥건한 것을 볼 때 살해는 일어난 걸로 보여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정신과의사 살해는 왜 언급되지 않는 걸까요? 할리 퀸이 정신과를 전공한 의대생이었기 때문일까요?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전편에서 우발적 살인은 지하철 안에서 일어난 두 번의 살인뿐이에요. 자신을 괴롭히는 금융회사 직원 두 사람에게 아서는 자기 방어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총을 발사한 겁니다. 이후 도망가는 한 명을 지하철 바깥까지 쫓아가 죽이고 머레이 프랭클린까지 죽인 것은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 혹은 거듭난 후 억압적인 엘리트층 혹은 엘리트층에 동조하는 자나 민중 내부 파괴자들을 처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죠. 금융회사 직원에 대한 살인도 나중에 조커가 된 아서에 의해 ‘처단’으로 정당화돼요. 정신과의사도 사회 엘리트로서 처단의 대상이 됐죠.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목표를 추구하려는 극단주의적 포퓰리스트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전편의 정신과의사 상담 장면과 그 처단 장면으로 속편을 시작했다면 전혀 다른 구성이 됐을 거예요. 연출된 의도와 많이 달라졌겠죠. 그래서 그 장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편 <조커>에서 살인은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행한 의도적 처단 행위라면,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살인은 미치광이 조커가 벌인 정신 착란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변호인에 의해 언급되다가 심경 변화를 일으킨 아서가 뉘우치는 반사회적 범죄 행위에 불과합니다.
대자적 포퓰리스트의 갈등
세 번째 주인공 아서 플렉의 심리와 정체성 변화로 들어가겠습니다. 앞에서 첫 번째 비교 지점을 설명할 때 이미 조금씩 말씀드리기도 했죠.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아서 플렉은 어머니가 해피라고 부르고 세상에 웃음을 주기 위해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꾸는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청년이에요. 그는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참아내요. 하지만 자신의 모든 삶이 거짓이었고 세상의 모든 조롱이 엘리트 지배계층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는 것을 깨닫죠. 구조적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 속에 갇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던 즉자적 존재가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이를 집단적 정체성으로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대자적 존재로 변한 거예요. 조커는 그렇게 탄생했죠. 하지만 그 방법이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극단주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전편 <조커>는 신자유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또 다른 극단적 저항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소격 기법으로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속편 <조커: 폴리 아 되>에서는 이 변화가 다시 거꾸로 진행된 것처럼 보입니다. 작품성과 관련해 여러 혹평들 중에서도 클라리스 파브르(Clarisse Fabre)가 Le Monde 지에서 “연금술은 작동하지만, 창의성은 찾을 수 없다.”라고 혹평했고, <씨네21>에서 이병현 평론가도 “정(正)도 없고 반(反)도 없는” 시리즈라고 깎아내렸어요. 하지만 안치용 평론가가 <오마이스타>에 게재한 평론에서 설명했듯이 아서는 자신을 따르던 한 젊은 수감자가 교도관들에게 폭력을 당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을 깨닫죠. 초기의 아서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재각성한 것으로 본 거예요. 저도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는데요. 재각성한 아서는 조커라는 인격을 안고 가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