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레시 4월 월요시네마 <콘클라베>
세 텍스트들의 상호텍스트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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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안녕하십니까? 피프레시 코리아 회장을 맡고 있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되는 시기에 아주 시의 적절한 영화 한 편을 가지고 월요 시네마를 진행 해 볼까 합니다. 바로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영화 <콘클라베>인데요. 교황 선출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봉쇄하다라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 영화 <콘클라베>를 진행해주실 계명대학교 명예교수(영문학과)이신 정문영 영화평론가를 소개합니다.
발제자:
안녕하세요. 정문영입니다. 지난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종하시고, 최근 바티칸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황 선종 후 장례 절차와 의식의 중계방송과 콘클라베에 대한 전망 등, 지금 우리는 바티칸과 콘클라베를 아주 가까이 있는 현실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각본상,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사실 저의 영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각색 연구’(Adaptation Studies)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를 각색 연구의 관점에서 접근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감히 제가 다루기로 했습니다.
'콘클라베' 포스터.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1. 각색영화 <콘클라베>: 다시-보기(re-vision)
최근 각색 연구는 각색 작품, 각색 영화를 분석할 때, 원작에의 ‘충실성’을 적절한 기준을 삼기보다는, 원작과 각색 모든 텍스트들이 “하나의 상호텍스트적 참조, 변형, 리사이클링, 변용(transmutation)의 매트릭스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원본에 대한 충실성 또는 우열을 평가하는 대신 ‘다른 종류의 보기들’로, 일종의 ‘대화적 반응들’로 간주하고 접근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의 주제와 메시지의 핵심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다는 것, 즉 매체 전환을 한다는 것은,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기존의 내레이션을 다른 사유 방식, 영화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매체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의 사유방식은 우리의 기존 인식을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성를 구현하는데 매우 유력한 매체라고 들뢰즈는 주장합니다.
각색은 기존 텍스트에 대한 개입 행위, 다른 수정된 관점을 제시하는 “다시-보기”(re-vision)의 글쓰기입니다. 다시-보기로서의 각색 동기는 기존 텍스트에서 여전히 비가시화되고, 주변화된 소수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가시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보기”는 각색 연구의 주요 개념으로 쓰이지만, 원래 아드리엔 리치(Adrienne Rich)의 페미니즘의 산물로 성정치성이 반영된 용어입니다. 사실, 다시-보기로서의 각색영화들 가운데, 의도적이 아닌 경우에도 성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극작가 해럴드 핀터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30여 편의 각색 작품들의 대부분도 성정치적 전복성을 그의 다시-보기의 동인으로 전유한 사례(해럴드 핀터의 영화 정치성(2016) 참조)입니다. <콘클라베> 또한 원작 소설의 각본 작업과 영화화 과정을 통해, 기존 텍스트에서 여전히 또는 충분히 주목 받지 못한 여성 등장인물 수녀들, 특히 아그네스 수녀(Sister Agnes)의 목소리와 역할이 더욱 가시화되는 성정치적 관점에서 다시-보기를 시도한 각색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텍스트들의 상호텍스트적 읽기
<콘클라베>로 각본작가 피터 스트로언(Peter Straughan)이 다수의 유력한 각색상 또는 각본상을 받았지만, 영화는 연극의 경우와는 달리 스크립트를 쓴 각본작가가 아니라 감독의 영화, 즉 <콘클라베>는 에드바르트 베르거(Edward Berger)의 영화로 간주됩니다. 사실 영화는 각본대로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과 촬영 현장의 변수도 있지만, 감독 자신의 수정된 관점을 반영한 각본에 대한 다시-보기로, 변형되어 완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영화 <콘클라베>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를 제공하지만, 원작 소설, 각본, 그리고 영화화된 <콘클라베>, 세 텍스트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적 읽기는 세 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관람 방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1) 해리스의 원작소설 콘클라베(2016)
<콘클라베>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로버트 데니스 해리스(Robert Dennis Harris)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하고도 각색 작업(<폼페이>(Pompeii, 2007), <유령 작가> (The Ghost Writer, 2010)와 <장교와 스파이> (An Officer and a Spy, 2019))을 한 해리스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의 작품들을 주로 쓴 소설가입니다. 그가 소설 콘클라베를 쓰게 된 계기는 바로 최근 선종하신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2013년 콘클라베라고 합니다. TV 화면에서 비밀선거가 끝나고, 새 교황의 선출,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선언 직전 등장해 발코니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운 늙은 추기경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그때 막 끝낸 키케로(Cicero)의 3부작이 다룬 “지배권을 가진 남성 일색의 원로원(입법부)의 로마공화정“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작가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나이든 남성 추기경들과 로마공화정과의 직접적인 연관 관계의 발견으로 콘클라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결과 픽션 콘클라베를 다룬 정치 스릴러 콘클라베를 썼다고 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된 바티칸 교황청의 역사를 다룬 다큐에 등장하는 꾸리아(Curia)는 로마 원로원(senate house)과 같은 용어라고 합니다. 교황을 보필하는 조직이어야 할 꾸리아가 실은 교황을 괴롭히는 특권을 휘두르며 만행을 일삼는 집단이 된 것을 다큐를 통해 보게 됩니다. 이 소설은 이러한 다큐 속 꾸리아를 연상시키는 늙은 추기경들이 참가한 콘클라베의 전개 과정을, 로마 원로원에서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정말 매혹적인 원색적 정치“를 다룬 일종의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스트로언의 각색 콘클라베(2024)
원작 소설은 교황의 선종으로 인한 ‘세데 바칸테(Sede Vacante)’, 3주후 콘클라베 전날, 첫째, 둘째, 셋째 날, ‘하베무스 파팜’에 이르기까지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정한 정확한 규칙을 반영하여 진행하는 허구적인 콘클라베 이야기를 다룬 19장으로 마치 시퀀스를 염두에 둔 구조로 구성되었습니다. 혁신적인 소설 기법으로 절대로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겠다는 존 파울즈(John Fowles) 같은 작가와는 달리, 최근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해리스처럼 영화로 각색될 것을, 상호매체성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파울즈의 메타픽션적인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도 결국은 핀터의 각색으로 카렐 라이즈(Karel Reisz) 감독이 메타영화적인 동명의 영화(1981)로 만들어졌습니다.
각색 각본 콘클라베를 쓴 스트로언은 핀터처럼 극작가입니다. 그의 각본의 구성과 주제는 원작에 매우 충실한 다시-보기임을 확인시켜줍니다. 각색 작업을 위해 바티칸 답사와 콘클라베를 연구한 스트로언은 바티칸이 “상당히 황홀한 연극적인 세계”이며, 콘클라베는 그 세계의 “숨막히는 통제와 형식성”을 드러내 보이는 엄숙한 “의식”(ritual)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매체전환을 통해 원작의 바티칸이라는 공간과 콘클라베를 연극적인 스펙터클로 만드는 각본을 씁니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구성으로 그는 형식주의적 의식과 의례가 전개되는 화려하고 세련된 세계뿐 아니라 그 표면 세계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함께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다시-보기를 실천합니다. 그 스펙터클은 “절대적인 고대의 아름다움과 굉장한 스케일”의 시스티나 예배당(Sistine Chapel)과 이와는 대조를 이루는 비즈니스 컨퍼런스 센터 느낌의 소박한 도미토리, 성녀 마르타의 집(Casa Santa Marta)이라는 시각적으로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콘클라베' 복도 스틸컷.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추기경들이 전 세계의 카톨릭을 대표할 교황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주 무대“(major stage)로, 수녀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을 ”무대 뒤“(backstage)로 하는 대조 효과로 멋진 세팅을 만듭니다. 이러한 대조를 위해, 실제로는 좀 밋밋한 성녀 마르타의 집을 추기경들이 갇혀 있는 감옥 같은, 음모가 일어나는 곳 같은 느낌을 주도록 극적인 파격을 더해서 세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적인 파격은 “가장 중요한 일들은 항상 다른 곳에서, 법정의 복도에서, 회의의 막후에서 일어나며 거기서 사람들은 정의의 실제 문제인 권력과 욕망의 실제적이고 내재적인 문제들을 직면한다”라는 들뢰즈의 지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추기경들이 모여 비밀 모의를 하는 성녀 마르타의 집의 어두운 강당, 표를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모아 줄 것인가를 논의하는 어둠 속 층계참, 자격이 없는 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