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네마 Monday Cinema

월요 시네마 12 '브루탈리스트' 정재형 평론가

피프레시 2월 월요시네마 :

<브루탈리스트>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10

 

224일 정재형 평론가 발제, 2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영화평론가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 (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224일 정재형 영화평론가가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이번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브루탈리스트' 포스터.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사회자: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오늘 피프레시가 주최하는 월요시네마 바로 <브루탈리스트>를 갖고 정재형 교수님이 발표를 해 주시겠습니다.

 

발제자: 안녕하십니까? 정재형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한 시각으로 봤어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또 인간과 사물을 나누죠. 인간 중심주의는 인종, 계급, 젠더로 차별하고 또다시 중심과 주변의 차별을 만들어내거든요. 나치가 인종 우월주의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미국에서는 계급을 통한 차별이 행해지죠. 라즐로는 헝가리에서 나치에게 당하다가, 미국에 와서 또 계급 차별을 받죠.인간 드라마긴 하지만 라즐로는 건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죠. 그의 영혼은 건물에 들어가 있고 건물은 그의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행동한다고 봅니다. 그하고 건물의 관계는 종속적인 게 아니에요. 인간이 물질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건물 안에 들어갔어요.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해요. 그가 건물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의 혼이 움직이고 건물이 실행하는 거예요. 건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는 자신의 제단을 쌓는다는 대사가 나오죠. 그와 건물은 동격화되어 있어요.

 

영화의 중심, 건축물

사물 중심적으로 읽을 때 건축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건축 중심적으로 본다면 라슬로가 미국에 도착해서 해리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사(prehistory)에 해당하는 거예요. 이후 센터가 구상이 되잖아요. 그다음에 센터가 중단되고 마지막에 재평가되는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어요. 건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전사가 있고, 구상이 되고, 구축이 되고, 중단되고, 다시 부활하는 건물의 이야기인 거예요. 다섯 단계를 거쳐 센터의 변신과 센터의 탄생과 영생의 주제를 갖는 거예요. 어머니를 위한 추모 공간이었다가 기독교인을 위한 시민 공간이 되었다가 그렇게 구상돼서 건축이 됐죠. 그러다가 중단되면서 결국은 나치 수용소를 경험한 희생자의 추모 공간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 건축 공간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 정체성은 과정 속에서 변화되고 계속 의미가 수정되어 간다라는 그런 존재론을 느낄 수가 있어요. 건축물은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그런 수단이 아니라는 거예요. 건축가가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인간과 공생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창의적인 의미를 교환하는, 인간과 대등한 비인간이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아닌 사물이 인간과 동등하다는 거죠. 그렇게 건축의 의미가 변한다면 건축이라는 사물 자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사물에게 관계 맺기 위해서 다가왔다고 볼 수 있어요.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다가온 거지 인간이 사물을 끌어와서 인간의 의견을 발표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물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자기한테 온 거예요.자연속에 돌들과 철제들이 있었겠죠. 인간들이 온 거예요. 해리슨이 건축물을 욕망했고 라즐로와 함께 물질에게 다가 온 거예요.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건물의 잠재성

철학자 들뢰즈가 말한 잠재성이죠.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현실화됐다고 보는 거예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거대한 원석을 보면 그 안에 이미 작품이 깨고 일어나려는 욕망이 보인다. 그래서 자기는 그를 억누르고 있는 주변을 쪼아내서 그를 해방시킨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자연속에 이미 센터가 있었던 거예요. 돌과 철제 사이에서 뭔가 어떤 형태가 있었던 거예요. 인간이 물질에게 다가와서 해방시켜준 거죠. 그걸 관계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관계가 중요한 거지 사물의 정체성이나 누가 만들었다는 인간의 우월성은 중요하지 않아요. 라슬로가 만들었다고 보는 순간 인간 중심주의가 되죠.

인간과 물질의 동등한 개념은 전이(transpostion), 즉 위치를 바꾼다라는 거죠. 포스트휴먼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용어지만 들뢰즈 용어로는 되기입니다. 모든 모든 사물이나 생명은 한순간에도 자기 존재로 자기의 정체성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없어요. 끊임없이 ‘-되기를 하는 거죠. 영화속 건축물의 의미가 변형되고 적응돼서 새로운 의미로 변했잖아요.유목적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유목민처럼 한시도 고정돼 있지 않다. 라즐로의 삶도 계속 유목적 주체잖아요. 헝가리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 사는 헝가리계 유대인 그의 정체성이 뭘까요? 그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질문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유목적 주체

어머니를 위한 센터를 해리슨이 기획했다고 해서 끝까지 어머니를 위한 센터로 남지는 않았죠. 그것을 전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인간인 라즐로에게도 적용이 되죠. 젠더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적이에요. 아내인 엘리사벳하고 비교하면 양성성(androgyny)을 갖고 있어요. 엘리사벳이 더 행동적이고 남성성인 것처럼 보여요. 능동성을 남성성이라고 얘기하고 수동성을 여성성이라고 얘기한다면 둘다 양성성이죠. 이분법적인 젠더 정체성으론 설명이 안 되죠. 그냥 계속 변화되는 거예요. 영화의 처음에 라즐로가 창녀를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 씨네 21건축가의 눈으로 본 영화 <브루탈리스트> 아름다움을 팝니다라는 제목의 평론에 이런 귀절이 나와요. “영화 <브루탈리스트>에는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 라즐로 토스가 매춘부를 품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상하게 이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매춘부보다 라즐로의 몸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매춘부의 머리 위로 라즐러의 조각상 같은 몸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몸을 파는 것인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다.”

 

장면을 보면 창녀가 몸을 팔고 전시를 해야 되는데 오히려 라즐로가 웃통을 다 벗고 있고 여자가 그걸 더듬는 거예요. 마치 구매자가 여성이고 라즐로는 남창같이 보여지는 거죠. 이 글을 쓴 건축가는 종래의 남성우월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장면은 정말 이상한 느낌이라는 것을 고백하죠.전 이 장면이 바로 라슬로의 유목적 주체를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보는 겁니다. 라슬로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여성‘-되기의 모습이라 볼 수 있죠. 여성성을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여성‘-되기의 과정으로 변형됐다고 보이거든요. 종래의 남성 주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여성‘-되기로 변신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나아가서는 여성-되기 뿐 아니라 라즐로의 건축물-되기가 보여지죠. 사물이 되고자 하는 사물‘-되기가 보여지는 거예요. ‘-되기의 과정 그게 바로 모든 존재의 생성 변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생성 철학에서는 환원론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브루탈리스트' 스틸컷. 사진 제공=유니버설 픽쳐스

그의 존재라는 게 건축물로 남고 건축물은 철근과 콘크리트고 그거는 뭐예요? 자연으로 귀속되는 거죠. 환원되는 거예요. 라즐로의 건축은 인공이 아니라 자연을 구현했다,라고 얘기하죠. 그게 바로 거친 콘크리트고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사조가 거기서 나온 거거든요.그의 삶은 자연으로 환원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러한 브루탈리즘 콘크리트 건축, 자연과 닮은 건축을 했다,라는 거는 그의 삶 자체가 자연으로 환원되고 그와 자연은 하나고 자연에서 나와서 잠시 문명에 머물렀지만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다,라는 환원론으로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사물간의 관계성센터를 헤리슨이 기획했다가 헤리슨이 중단시켰다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센타는 해리슨의 욕망을 달성시키기 위한 수단이고 인간의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발상이죠. 물질은 도구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오는 거예요. 근데 센터의 설계는 사실 라슬로가 한 거잖아요. 그리고 재정의 상당수는 어디서 나왔어요? 시에서 나온 거예요. 시에서 나온 돈은 누가 낸 거예요? 시민들이 낸 거예요? 그렇죠. 공사는 누가 했어요? 노동자들이 했어요. 그리고 재료는 뭐예요? 콘크리트 철근 기타 등등. 그것만 있나요? 날씨도 있고요. 기온도 있고요. 땅과 모든 요소들의 합작품이에요.부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같은 철학자가 말하는 관계성이라는 거죠. 인간과 인간관계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도 다 동등하다는 것. 라즐로의 정체성은 그와 관계를 맺은 모든 관계성으로 설명을 해야 돼요. 그의 아내 엘리자벳, 조카 조피아, 친구 아틸라, 미국에 사는 유태계 헝가리 이주민들, 흑인 고든과 같은 노동자들, 해리슨과 그의 가족, 사교계 인물들, 이런 모든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물이 바로 라즐로라는 사람인 거예요.

 

그의 정체성인 거예요. 이들의 비중은 다 같아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raway)의 사이보그(Cyborg)론으로 보면 모든 사람은 다 기본적으로 인조 합성물이라는 거죠. 인간이 비인간, 즉 사물과 같이 일심동체가 돼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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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심영섭

등록일2025-05-26

조회수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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