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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4월 29일 황영미 영화평론가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 2024)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두 번째 줌 세미나에서는 3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사회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본 협회에서 주관하는 ‘월요시네마’. 오늘은 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님을 모시고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2024)에 대한 흥미로운 발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발제자: 반갑습니다. 영화평론가 황영미입니다. <오키쿠와 세계>는 아주 독특한 영화인데요, 따뜻하고 의미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먼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키쿠와 세계>라는 영화는 우리나라에 『씨네21』 같은 영화잡지처럼 일본의 정평있는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 2023년 베스트10에서 1위를 했어요. 그런데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에는 일본 대표로 <오키쿠와 세계>가 나가지를 못했고, 빔벤더스 감독의 <퍼펙스 데이즈>가 나가게 됐죠.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 5위 후보 안에 들었지만, <오키쿠와 세계>가 나갔다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폴란드 아우슈비츠와 담을 사이에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독일 고위 장교 가족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섬뜩하게 그리는 탁월한 영화가 수상했지만, <오키쿠와 세계>도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경쟁했을 법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제목이 주인공인 오키쿠를 먼저 쓴 <오키쿠와 세계>라고 되어 있는데요. 일본 원제는 <세카이 노 오키쿠(せかいのおき)>입니다. ‘세계의 오키쿠’라는 것입니다. 아이엠디비(https://www.imdb.com/)라는 평론가들이 자주 보는 미국 사이트에 보면 평점이 나와 있는데요,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평점인데 아이엠 디비(imdb)에서는 6.9점이라고 돼 있습니다. 7점 가까이 되거나 7점이 넘어가면 상당히 작품성을 높게 인정받은 영화라고 볼 수가 있죠. 이 영화는 인분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계급을 뛰어넘는 청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인분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카모토 준지라는 일본 사회파의 대표주자 감독의 탁월한 미학적 능력 때문입니다.
오키쿠와 세계 스틸컷
감독의 특성
감독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나 하는 것이 예술 영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경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순환경제’가 중요해집니다. 즉 우리가 쓴 것이 쓰레기로 쌓이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자연이 순환되듯이, 식물이 새로 씨앗에서 시작해서 자라서 꽃이 피고 씨앗을 남기고 소멸하고 씨앗에서 다시 시작하듯이, 인간도 자연의 산물을 먹고 성장하고 살다가 죽어서 흙이 되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식물의 순환을 생각해 봅시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즉 ‘순환경제’의 관점으로 쓰레기를 없애는 방법을 찾는 차원에서 <오키쿠와 세계> 영화가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한한 사카모토 감독은 “사회 밑바닥 분뇨업자를 통해 코로나19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죠. 에도시대는 사람에게서 나온 인분이 거름으로 사용되고, 이 거름으로 키운 채소가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환경제’가 활성화하던 때입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일본에선 물건을 헛되이 쓰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분뇨를 거름으로 쓰는 일을 비롯해 영화에서 나무통을 고쳐 쓴다든가, 종이를 다시 쓰는 등 끝까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문화를 일회용 물건이 넘치는 지금 시대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올해 65세의 나이로 휴먼 드라마, 서스펜스, 스펙터클한 대작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테마의 대중영화를 선보였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30번째 작품으로 처음 흑백 시대극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일본의 흑백 영화이고 잔잔한 화면 구성을 가진 일본 특유의 화면비 4대 3비율로 영화를 찍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독특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곳에서 사카모트 감독이 인터뷰하실 때, 일본 선배 감독들의 고전적인 요소나 촬영 기법을 활용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특히 개인의 일상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잔잔한 고전 가족드라마 영화의 라인이 있잖아요. 다른 일본 감독들도 있지만, 미조구치 겐지라든가 오즈 야스지로 등의 감독들의 특징과 <오키쿠와 세계>가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적이면서도 굉장히 처절한 현실을 극복하는 삶의 이야기를 소재로, 잔잔한 구성으로 구현하는 특성이 있는 선배 감독의 고전영화 같은 분위기를 같이 내고 싶었다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제가 이 두 분만 말씀을 드렸어요. 감독 인터뷰를 들어보면 분뇨를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박스 종이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색깔을 유사하게 내기 위해 녹차도 써 가면서 여러 가지로 분뇨의 효과를 최대한 냈다고 합니다. 분뇨 장면이 많기 때문에 컬러로 찍으면 관객들이 거북하기 때문에 흑백으로 찍은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실은 제작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영화적 특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엣나인필름 제공
영화의 구성
영화는 7장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서장(序章)이 있고 마지막 장이 있어요. 그런데 장마다 각각의 단편들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볼 때는 일부러 이렇게 구성을 한 것 같아서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보게 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제작 비화가 있었더라고요. 인분을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작비를 투자받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우선 단편 한 편을 굉장히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만든 다음에, 투자를 받아서 또 나머지들을 하나하나 맥락에 맞게 구성하다 보니까 마치 이 연작처럼 이렇게 단편 7편으로 구성되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장은 ‘에도의 똥은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재래식 병기를 소위 푸세식이라고 하잖아요. 그 변기에서 인분을 푸는 장면부터 시작이 됩니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서 시작한 시대입니다. 영화<노량>을 보면 그 내용이 도입부에 나오잖아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할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갈등이 나오죠. 역사적으로는 이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도읍을 정하고 1603년부터 1868년까지 270년간 에도막부가 지배를 하게 됩니다. 1868년에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바로 전 단계인 1858년을 이 영화가 배경으로 잡아 1~2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는 사실은 일본은 중세 다음에 바로 근대죠. 막부 시대 다음에는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는 게 이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었죠.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영화의 서장은 1858년 에도의 늦여름에서 시작을 합니다.
장면과 영화의 의미
영화의 주인공 ‘오키쿠’(쿠로키 하루)의 아버지가 사무라이였죠. 상관의 부정함을 고발했다가 면직을 당한, 어떻게 보면 굉장히 훌륭한 아버지이지만, 오키쿠가 볼 때는 원망스러운 감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 겐베이(사토 코이치)와 외동딸 오키쿠가 살아가는 공동주택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는 젊은 주인공 세 명이 있습니다. 사무라이 딸인 주인공 오키쿠는 원래 귀족이었지만, 아버지가 면직을 당해서 굉장히 가난한 공동주택에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또한 인분업자 청년 둘이 있습니다. 얼른 봐서는 사무라이 딸과 인분을 퍼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전혀 말도 안 섞을 것 같고, 특히나 계급 사회에서는 더했을 것 같은데, 그 세 사람의 청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게 됩니다. 인분을 사고파는 분뇨업자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 츄지(칸 이치로)가 등장하여 사랑과 우정을 잔잔하게 담아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는 야스케라는 분뇨업자가 화장실 뒤에서 분뇨를 푸고 있고 마을에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서 나온 어린 스님이 분뇨업자인 야스케에게 인분값을 받고 있는데, 반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야스케가 계급사회에서 최하층민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다음 장면이 포스터에서 나오는 장면인데요. 츄지는 원래 종이를 주워다가 폐지를 파는 사람이었는데, 폐지 모으는 곳에서 버리기 아까운 종이를 모아 오키쿠에게 주기도 했죠. 그런데 수입이 더 나은 분뇨일을 하는 야스케 옆에서 일을 배워서 같이 일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가족이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포스터에서 나온 도입부 장면은 비가 오는데, 이 세 사람이 화장실 처마 아래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시 같은 문학에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랑이 싹트는 상징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곽재용 감독의 한국영화 <클래식>에서 조인성과 손예진이 비를 맞잖아요. 포스터 장면을 보면 조인성이 자켓으로 손예진의 비를 가려주는데, 그때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키쿠와 세계>에서도 이 포스터 장면에서 오키쿠는 아는 척을 하는 야스케한테는 냉정하게 대하면서도, 츄지를 볼 때는 눈인사를 하면서 다정하게 대하죠. 왜냐하면 츄지가 폐지 중 쓸 수 있는 깨끗한 종이를 찾아 오키쿠한테 준 적이 있어서 둘은 조금 좋은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이 장면은 세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것도 보여주면서, 비를 피해 함께 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 튼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와 영화의 의미
‘무적의 오키쿠’라는 장에서는 장대비 때문에 배가 운행하지 않게 돼, 야스케가 인분을 푸러 오지 못해서 공동주택 화장실의 인분이 거리까지 넘치는 상황이 나옵니다. 여기서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캐릭터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코를 싸쥐고 냄새를 호소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넘쳐난 인분의 장면에서 마치 인분 냄새가 영화 바깥으로 나오는 것 같은 리얼함이 드러납니다. 서로들 불평을 하고 있는데, 분뇨 업자 야스케가 드디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 겐베이와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오키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정의를 추구하려고 했지만, 사회에서 배타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아버지가 면직당하는 바람에 자신도 에도의 최하급 공동주택에 살고는 있지만 오키쿠의 자존심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야스케 뒤에 따라온 츄지를 볼 때는 눈을 아래로 내려보며 공손해집니다.
오키쿠의 아버지는 굉장히 꼿꼿한 사람인데, 어느 날 사무라이 차림을 한 사람이 찾아와서 둘이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오래된 원수 사이로 결투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결투 날짜를 정하고 찾아왔던 사무라이는 사라집니다. 야스케는 츄지에게 분뇨일을 시범을 보이면서 공동주택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며 자기는 사무라이 마을을 주로 맡을 테니 츄지가 이 마을을 맡아 달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는 연극 같아요. 공동주택에서 주로 나오고 외부는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어떤 연극적인 밀도가 있죠. 캐릭터도 잘 살려주고 공간의 이동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후 츄지가 이 마을의 인분을 푸러 왔을 때, 오키쿠의 아버지 겐베이가 문 높이가 반만 되어 있어서 화장실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겐베이는 오키쿠가 성격이 까다로우며 오키쿠가 싼 주먹밥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요구를 하면 다시는 안 싸준다는 말을 해줍니다. 이는 나중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복선이 됩니다. 그는 츄지에게 ‘세계’라는 말을 아는지도 물어봅니다. 츄지는 글도 배우지 못해서 모른다고 합니다. ‘하늘의 끝, 그게 바로 세계’라고 아버지가 얘기를 해주죠. 그동안은 일본 내에서만 모든 일들이 일어났는데, 네덜란드도 들어오고 포르투갈도 들어오고 외국과의 교류가 생기면서 ‘세계’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거죠. 새로운 세계가 열려 일상이 달라지는 일본 사회의 변화의 지점을 얘기하는 데 이 ‘세계’라는 말이 사용되게 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을 제일 좋아한다’라고 얘기를 해주도록 하라며 사랑과 세계를 관련해서 말하게 되죠.
그리고 오키쿠의 아버지는 결투를 하러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결투하는 장면은 안 나와요. 결투의 끝만 보여줍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오키쿠는 츄지에게서 아버지가 무사들과 함께 서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굉장히 위험하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도 방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 가슴에 품고 비장한 각오로 집에서 달려나갑니다. 다음 장면에서 결투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사무라이들이 칼을 칼집에 꽂는 장면이 나올 뿐이죠. 칼을 썼다는 얘기죠. 그리고는 사무라이들은 오키쿠의 아버지가 쓰러진 곳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처절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버지만 다친 것이 아니라, 오키쿠도 목을 칼에 베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죠. 다행히 죽지 않고 목소리만 잃게 됩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오키쿠는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상처를 입고,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두문불출합니다. 공동주택의 이웃 사람들이 오키쿠 집 앞 툇마루에 먹을 것을 갖다 주고, 필요한 것을 갖다 주지만 오키쿠는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관을 짜는 사람, 분뇨업자 등 최하층 계급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츄지는 야스케한테서 점차 분뇨에 관련한 일들을 배우지만, 천성적으로는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스케는 분뇨업자로 오래 일한 사람이어서 변을 더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변을 통해서 우리가 돈을 벌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게다가 야스케는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면서도 웃습니다. 인분을 뒤집어쓰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해도 그는 웃습니다. 분노를 넘어서는 유머를 가진 거죠. 유머로 극복하면서 “츄지, 여기서 웃어야 돼”라고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극복하는 야스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우리가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감독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키쿠가 상처를 입고 결국은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절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스님과 아이들이 오키쿠의 집에 찾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죠. 그리고 학교에 다시 나와달라 얘기를 하는데 오키쿠는 그제야 문을 열어줍니다. 그들의 간곡한 권유로 오키쿠에게 큰 변화가 생기는데요.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이 된 거잖아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보면 신분의 변화일 수도 있고요. 이때부터 오키쿠의 세계가 변화하게 됩니다. 오키쿠는 스님과 아이들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자신이 목소리를 잃었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손동작으로 전달합니다. 스님은 일단 학교에 나오면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데요, 오키쿠는 학교에 나가서 글을 써서 보여주면서 스님이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소통의 장애가 생겼을 때 오히려 자기의 존재감이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무라이 세계는 잘난 척이나 하고 노름이나 하고 살아가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왜냐하면 사무라이는 열심히 다른 성에 있는 사무라이와 싸워야 되는데, 에도 말기에는 점차 싸움이 없어지니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층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반면 한심하게 노름이나 하고 인성도 좋지 않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사무라이 계급을 비판하는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죠. 인분값을 더 달라는 사무라이에게 이것이 최선이라고 답하는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뿌린 인분을 뒤집어 쓴 채 발로 채이고 얻어 맞기까지 합니다. 오키쿠는 길을 지나다 야스케가 맞아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과는 달리 야스케를 안쓰러워 합니다.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서 세계가 새로워졌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장면인 비오는 화장실 앞 장면에서는 오키쿠가 야스케에게 자기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대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인분을 뒤집어 쓴 야스케 얼굴을 닦아주려고 자신의 손수건을 자꾸 야스케에게 갖다 대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던 오키쿠의 곁을 지나가는 귀족 여자들이 비웃어도 오키쿠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계 인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키쿠가 장애를 입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 인식을 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츄지는 평소 알고 지내는 관짜는 사람한테서 오키쿠가 큰 상처를 입고 목소리를 잃었지만, 절의 학교에 나가서 글씨로 소통한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할 내용을 글씨로 쓰게 되면 종이가 많이 필요하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츄지는 깨끗한 종이를 말아가지고 오키쿠를 찾아옵니다. 사랑의 표현이죠. 물론 전에도 오키쿠는 츄지를 좋은 인상과 느낌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하고도 사무라이 계급의 딸이지만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제 츄지를 위해 오키쿠가 주먹밥을 정성껏 싸고 큰 나뭇잎에 곱게 싸서 가슴에 품고 츄지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만 수레에 치이어 넘어지면서 가슴 안에 있던 주먹밥이 수레바퀴에 눌려 흙도 묻고 납작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잘 싸서 가슴에 품고 츄지의 집을 어렵사리 물어보며 츄지의 집 앞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츄지를 만나자 츄지의 냄새에 자연스럽게 코를 싸쥐는 자기 손을 때리면서 ‘그러면 안 돼’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츄지에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합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손과 몸동작으로 전달을 하죠. 당신을 주려고 주먹밥을 쌌는데, 수레 바퀴에 치이어서 주먹밥은 납작해졌다고 손발을 동원해가며 전달합니다. 츄지도 오키쿠에 대한 뜨거운 사랑, 가슴속에 가득 찬 사랑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땅을 칩니다. 츄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당신을 제일 사랑한다’는 말이죠. 츄지는 오키쿠와 같은 입장, 즉 말을 못하는 입장이 돼서 오키쿠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합니다. 츄지가 손끝을 위로 치켜올려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그게 바로 ‘세계’죠.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이 세계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전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죠.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비가 왔었죠. 영화가 시작할 때 사랑이 시작되고, 비는 계절이 바뀌면 눈이 됩니다. 눈도 사랑으로 표현되는 거죠. 두 청년도 변화합니다. 츄지는 절의 학교에서 글을 배우게 됩니다. 늘 사무라이에게 당하기만 하던 야스케는 오히려 사무라이를 골탕 먹이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이고요.
영화 속 ‘세계’의 의미
에도 말기에 외국이 들어오면서 그 이전에는 없었던 ‘세계’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신조어, 그때 핫한 단어라는 거죠. 일본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고 세계로 열리게 돼, 마음을 열게 되는 그 과정을 영화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는 소통이 된다’는 인식을 ‘세계’라는 글자와 함께 스님이 가르쳐주는 모습이 나오구요. 오키쿠는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이를 긍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신분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벚꽃나무 숲을 세 명의 청춘이 대화를 하면서 걸어 지나가는 엔딩이 나옵니다. 처음에 화장실 앞에서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벚꽃나무 길로 이 세 사람이 행복하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면서 수미쌍관을 갖게 됩니다.
이 영화는 원래 사가모토 준지 감독의 미술 감독 ‘하라다 마소’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시작된 ‘좋은 날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환경적인 차원에서 순환경제를 주제로 영화에 좋은 이념을 담아보자 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잖아요. 말하자면 인분이 거름이 되고 또 거기에서 새싹이 나오고 야채를 키워 인간이 그걸 먹고 또 인분이 되고 하면서 쓰레기가 없이 모든 것이 그대로 다 100% 순환이 되는 것이 바로 순환경제죠. 이런 것에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던 시기가 바로 에도시대의 인분순환이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인분이 가장 세상에서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데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구현하여 아름다운 청춘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인 것입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금기시된 인분을 주제로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대단한 감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름꾼, 분뇨업자인 직업이 주인공이 된 소설이나 영화가 여태 있었습니까? 없었던 것 같아요. 계급의 격차도 다 허물고 인간이 정해 놓은 사회적 규약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 속 메시지가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 가슴속에 남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오키쿠와 소통하기 위해서 츄지가 손으로 땅을 치면서 자기의 진심을 전하는 모습이 굉장히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옥 같은 대사들을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더 말씀드릴게요. 오키쿠의 아버지는 사무라이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여 쫒겨난 사람이지만, 아침이면 하늘을 보며 사방에 기원의 박수를 치며 비는 사람입니다. 오키쿠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비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것도 안 빈다, 단지 두려우니 비는 것뿐, 하늘이 어디 뜻대로 되더냐”라고 말합니다. 삶에 깊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사입니다.
또한 스님이 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키쿠가 글씨를 써서 학생들 앞에서 들고 있는 ‘세계’라는 한자에 대해 설명하죠. ‘이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가서 결국 처음으로 돌아온다’라고 말합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인터뷰에서 ‘세계’에 대해 말할 때, 나비 효과처럼 우리 세계의 한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또 다른 쪽에서 다 연결이 되는 게 바로 세계라고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한쪽에서 전쟁을 하고 있으면 우리 모두가 연결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렇게 관계되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주 천하고 낮은 직업을 가진 사람과 귀족인 사무라이의 딸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보여주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는 과정과 함께, 즉 시대 변화와 서민들의 살아가는 삶을 인분 하나에 다 꿰어서 이야기하는 대단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장마다 소제목이 나오면서 연도와 계절이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1858년 이른 봄, 늦은 봄, 늦여름, 겨울이 소제목과 함께 제시되면서, 계절이 순환하듯이 우리 삶도 순환하고 결국 우리의 인생도 태어났다가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세대가 바뀌고 하는 자연의 순환 속에 있다는 세계관까지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영화에서 툭툭 던지는 것 같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담기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운 서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요즘은 폭력적인 영화가 많아서 영화관 안 간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폭력적인 영화가 천만 영화 되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지금까지 7천 명 봤거든요. 폭력적인 영화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애잔하고 잔잔하면서 철학적인 삶의 통찰도 주면서도 애틋한 첫사랑의 감정을 그리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을까요? 츄지와 오키쿠가 첫사랑의 진심을 다시 우리한테 환기시켜주는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본다면 영화관 가기 싫다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줌(ZOOM) 세미나를 통해서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분들도 계시겠지만, 최근에 가장 아름다운 서정적인 영화로 오래 기억에 남을 영화라고 생각이 돼서 제가 여러분들께 추천을 드렸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내용 중에 의문이 드는 점이나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음소거 해지하시고 질문하시거나, 채팅창에 써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