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영화에 나타난 권력의 양상과 의미
이 명 희(피프레시 해외이사)
1. 들어가며
2002년 <피아니스트 The Pianist>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1933- )을 존경받아 마땅한 거장으로 세계에 각인시켰다. 오랜 기간 동안 비극과 추문의 주인공으로서 미디어의 바람직하지 못한 표적이었던 점에서 그의 몇몇 작품들은 일정부분 과소평가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뱀파이어의 무도회 Dance of the Vampires>, <악마의 씨 Rosemary's Baby>, <차이나타운 Chinatown>처럼 흥행에 대단히 성공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한편, 흥행은 차치하고 비평에서도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작품도 있었고, 숱한 영화개론서나 평론서는 그의 이름과 작품을 거론하지 않았던 사실도 알 수 있다. 또 당대에 쓰인 진지한 비평기록을 찾기도 그다지 쉽지 않다.
폴란드 우즈영화학교 학생 시절 이미 <두 남자와 장롱>으로 그의 비범한 재능이 유럽과 미국에 알려졌고, 그의 첫 장편 <물속의 칼>은 196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FIPRESCI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고 63년 9월 20일자 <타임>지의 표지에 영화사진이 실리며, 오스카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폴란스키는 일찍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폴란드영화학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60년대 얀초나 바이다 감독 같은 동구영화감독들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정치와 역사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았던 점이나, 사실주의와 고전적 영화기법을 고수함으로써 당대의 누벨바그의 작가들과는 궤적을 달리 했던 점, 할리우드와 영국에서 만들어진 여러 작품들이 표면적으로는 스릴러나 호러영화같은 장르영화처럼 보였던 점에서 진지한 비평적 범주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69년 아내 샤론 테이트 살해사건 직후 만들어진 <맥베스 Macbeth>(1971), 미국법정과 미디어의 추적과 공격을 받게 한 77년 성범죄사건직전 만들어진 <세입자 The Tenant>(1976)는 당시 과소평가된 대표적인 경우로 보인다.
어떤 영화사가는 <맥베스>가 셰익스피어의 졸속한 각색이라 했다. 당시 '3류사극'으로 대우받았으며, "흑마술을 다루는 데 능하고", "초자연적인 것에 취미가 있는" 감독이 만든 "정신병적 편집광의 합리화" 혹은 "맨슨 살해사건의 예술작품"으로 경멸당했다고 감독은 말한다. 당시 프랑스비평쪽에서도 드문 비평기록만 남아있고, 게다가 제목조차, "폴란스키는 <맥베스>를 망쳤다", "맥베스, 씨티즌 케인 혹은 미키마우스"였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영화화된 많은 <맥베스>가운데 폴란스키의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입자>는 제작사와 계약도 끝나지 않았는데 영화가 미리 완성되었을 정도로, 시나리오부터 극장개봉까지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만들어낸 영화다. 프랑스 미국 합작영화로 <세입자>는 1976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참가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한 인간의 광기를 다룬 이상한 영화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부조리를 통해 폴란스키 특유의 심리적 공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2. 권력의 실체
도덕과 양심의 갈등을 다룬 심리비극적 측면이 강조된 오손 웰즈와 아키라 구로사와 감독의 <맥베스>를 폴란스키는 모두 실패작으로 여겼다. 11세기 실제 스코틀랜드 역사의 충실한 고증과 디테일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17세기의 셰익스피어 원전을 충실하게 존중함과 동시에 유물론적 분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폴란스키는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강탈한 자에게 내리는 도덕적 심판, 즉 왕권과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거나, 혹은 권력욕의 허망함을 명석한 깨달음과 아름다운 시구로 읊는 비극적인 영웅을 보여주지 않는다. 맥베스의 독백은 보이스 오프로 처리되어 무의식적이고 내면적인 욕망과 갈등을 표현한다. 선에 기초한 질서의 개념이나 도덕의 우월성에 따라 인물들의 관계가 설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물이 아첨과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관계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낸 작품이며, 특히 권력과 억압의 실체가 끔찍한 폭력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맥베스는 왕이 될 운명이 예언되었기 때문에 그 운명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운명의 불확실성을 의심하는 불안감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타인을 희생시키고 결국 자신도 희생되게 하는 권력의 폭력이 실제 얼마나 잔인하며 비열한 것인지 보여준다. 신체의 절단을 보여주는 폭력, 목이 부러진 맥베스부인의 추락장면이나 맥베스의 잘려진 목의 클로즈업 등,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의 시각적 충격은 물론, 맥더프가에서 어린 소년 소녀에게 벌어지는 폭력은 영화 개봉당시 18세 등급을 받게 할 정도로 비난거리였다.
폴란스키는 폭력과 공포가 권력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당시 주로 좀비 호러영화를 통해 등장한 B급영화의 폭력과 함께 서부영화의 오락적 폭력이 서구영화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는데, 정치권력,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신체의 고통스러운 절단을 보여주는 폭력에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오락적 기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폴란스키는 자신의 영화에 쓰인 피는 샘 페킨파 영화에 나오는 피에 비하면 사실 몇 방울도 안된다고 지적한다. 폴란스키는 환상이나 개념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이 삶과 세계에 가하는 "현실 그 자체로서의 폭력"을 보여주고자 자신이 겪은 폭력을 영화화했다. 맥더프가에서 어린 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장면은 폴란스키 자신이 어릴 때 나치군인에게 직접 겪은 경험을 반영했다고 말한다. 즉 폴란드가 처했던 전체주의의 만행과 국민의 일상적 고통을 연결시켜 작품을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셰익스피어 이론가 얀 코트 Jan Kott와 같은 관점에서, 사실로서의 전체주의 국가폭력을 시각화함으로써 권력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극적 장치로 사용되는 운명의 불확실성은 맥베스가 폭력을 실행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동인이다. 왕권에 대한 저항과 반역을 악마적인 것으로 단죄하며, 종교적 정치적 질서의 회복으로 결말을 지어야 하는 셰익스피어 원전은 선과 악의 분명한 이분법에 대조하여 악마적인 무질서의 존재로서 맥베스와 마녀들의 캐릭터를 각인시킨다.
폴란스키영화에서는 인류가 전쟁이라는 살육과 피의 고통을 겪는 세상이 그 자체 악과 혼돈임을 암시하는 첫 장면에서,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로 영화를 시작하는 마녀들의 첫 불확실성의 언어는 영화의 세계관인 동시에 영화전체의 혼돈과 잔혹의 미학을 결정한다.
폴란스키의 마녀들은 우울하고 비교적 침묵하며 억압된 천민으로 그려진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등장하거나, 공기 중에 날아다니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실재적인 존재로서, 전쟁터로 변해버릴 땅에 다가왔다가 멀어지거나 짐수레를 끌고 방랑하는 자들이다. 눈이 없거나, 얼굴에 부스럼이 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며, 거지 혹은 정신질환자처럼 사회에서 황야로 쫓겨나 소외된 자들의 모습이다. 신비화되지 않고, 사회를 저주하고 조롱하며, 혐오스러운 것들을 애호하고 숭배하지만, 초자연적 권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셰익스피어에서 맥베스는 마녀들이 아첨하고 복종해야 할 왕이지만, 폴란스키에서 맥베스는 마녀라는 천민계급의 왕이며 조롱받는 대상이다. 모든 인물가운데 마녀는 유일하게 맥베스의 앞에서 자유와 조롱의 언어를 구사하는 계층이다. 마녀장면은 셰익스피어에서 초자연의 공포와 유희성을 동반한다면, 폴란스키에서는 조롱과 불안의 성격을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극히 인상적인 맥베스의 마녀방문 장면은 운명의 예언이 맥베스 내면의 혼돈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며 인간적 허약함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그들의 흉물스러운 나체는 금기된 악마적 제의의 혼돈과 광기를 강조 하며, 이 사바트 제의에 참가함으로써 맥베스는 악마와 야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에서는 맥베스에게 과잉 아첨하는 존재인 마녀지만, 폴란스키에서는 맥베스가 마녀에게 절망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권력관계가 바뀐다. 그러나 폴란스키의 마녀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맥베스가 만나고 싶어 한 악의 신, 마녀들의 주인은 곧 맥베스 자신이라는 걸 보게 하는 매개자이다. 마녀들로부터 미래의 진실을 들음으로써 불확실성에 따른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맥베스가 들여다보는 솥, 추한 것들이 끓어오르는 솥은 맥베스 내면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다름없다.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맥베스에게 반복하여 환기시키는 것은 맥베스 내면에 있는 또 하나의 맥베스가 하는 말이며 그의 의심에 대한 강박증처럼 표현된다.
그는 마녀가 준 약물의 마약적 효과에 의해 꿈을 꾸듯 불연속적이며 초현실주의적인 환각을 보게 되며, 그 속에서 자신의 공포와 헛되이 싸운다. 맥베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 타자화된 또 다른 자아가 의심과 악을 사주하는 듯한 장면이 된다. 파편적인 장면으로 이어지는 목이 잘려진 얼굴, 배를 가르고 나오는 피 묻은 아기 모습 (그는 여기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자는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다'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철가면의 맥더프를 죽이지만 뱀만 나오는 빈 가면, 달아나며 그를 조롱하는 말콤과 도날베인 (그들은 버남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그는 패하지 않을 거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린다), 이 모든 환상은 맥베스를 소외시키고 조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