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Film Criticism

분류1

Korean

(2012 전주 세미나)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 박태식 / 토론자 : 문재철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 영화에 나타난 리더십 -

박태식(성공회대 겸임교수, 성공회 신부, 영화평론가)

 

탈권위적인 지도자

지도자의 자질을 거론하면서 플라톤은 연장자가 사랑(필리아)을 통해 아래 사람을 철학적으로 잘 이끌어 그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칸트 역시 타인도 자신과 같은 인격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진정한 지도가 가능하다면서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게 지도자의 덕목임을 강조했다. 인류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탈권위적 지도자의 출현을 소원했지만 지나간 역사는 인류의 소원과 따로 움직였다고 말하는 게 아마 솔직한 답변이리라.

가톨릭 수도회에서 잘 쓰는 말로 영적지도자라는 것이 있다. 어감에서 풍겨나는 대로 물질적, 계량적 범위가 아니라 영성 차원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영적지도자라는 용어 대신 영적동반자라는 호칭이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지도자라고 하는 말이 왠지 거북스러운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거기에는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인간인데 영적 도움 좀 얻었다고 해서 지도자로 떠받들 필요까지 있습니까? 그러니 그저 영적으로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동반자 정도가 어울리지 않겠습니까?’라는 정서가 깔려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에서도 지도자보다는 멘토mentor’, ‘도반道伴이니 말이 귀에 잘 들어온다. 야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사성장군의 죽음보다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의 조촐한 죽음에 눈길이 더 쏠리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우리에게 어떤 지도자가 필요할까? 질문 자체가 진부하고 답도 빤해 자칫 싱거운 물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시대에 이 질문은 절실한데, 현대인은 무릇 권력과 지위를 앞세우는 지도자에겐 저항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도자의) 언행을 이성으로 수긍할 수 있어야 동기를 부여받는, 탈권위적 지도자가 권위적 지도자를 대체하는 세상으로 보아야 옳다. 그렇지 못한 경우 어떤 지도자라도 아마 통치는 가능하겠지만 존경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전히 권위적 지도자로 남으려 하는 일부 시대착오적인인물들을 두고 말이다.

우선 지도자의 권위를 문제 삼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하겠다.

 

아빠의 화장실

자전거를 타고 벌판을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 그들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물을 권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상당히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보면 실은 구식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 사람들이다. 건강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아빠의 화장실>((El Bano Del Papa, 세자르 샤론/엔리케 페르난데스 감독, 극영화, 브라질/프랑스/우루과이, 2007, 98)의 주인공 비토이다. 얼마나 페달을 밟아댔는지 무릎에 관절염이 생겼을 정도다.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접경 마을인 멜로는 이렇다 할 기간산업이 없는 곳이다. 그저 브라질에서 물건을 떼와 마을에 공급하는 게 최소한의 생계수단인데 그나마 이들을 등쳐먹는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떼어올 물건 목록을 건네주는 상점주인, 국경초소의 군인들, 자전거에 실은 하찮은 짐을 검사한답시고 수시로 그들을 쫓아오는 국경수비대, 그리고 가톨릭 교회가 있다.

1988년 우루과이를 방문한 교황이 멜로를 방문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마을은 들뜨기 시작한다. 교황을 보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 테고 그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단단히 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큰 빚을 내어 그날을 대비하는데 우리들의 주인공 비토는 기발한 꾀를 짜낸다. 도시에서 오시는 점잖은 분들을 위해 고급 유로 화장실을 만들어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을 위해 부산하게 준비했고, 특히 비토의 노력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결과는 대 실패! 교황은 나는 중요한 메시지를 갖고 이 작은 마을에 왔습니다. 서로 사랑하시오.”라는 하나마나한 연설만 남긴 채 표표히 사라졌고 10만 명이 찾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방문객은 고작 8천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는 정부쪽 인사들과 공식수행원과 보도진이었다. 교황과 그 일행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떠난 자리엔 처참하게 찢겨진 임시 천막들과 땅위에 나뒹구는 음식물뿐이었다.

<아빠의 화장실>1988년 우루과이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당시 우루과이를 국빈 방문한 교황은 브라질과 접경도시인 멜로에 들려 연설을 하겠다는 계획이 발표했다. 추측컨대 우루과이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마을의 방문을 통해 소외자들에 대한 교황의 각별한 관심을 부각시켜보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교황의 공식 방문행사 뒤로는 단지 멜로 주민들의 자괴감만 유령이 되어 쓸쓸히 마을을 떠돌아 다녔을 뿐이다. 사실 그렇게 된 데는 교황 방문 전부터 TV에서 현장보도를 한답시고 제멋대로 마을사람들의 허파에 바람을 넣은 탓도 있으니 언론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언론도 멜로 마을 사람들을 등쳐먹은 존재로 볼 수 있다.

 

스윙 보트

정치인들을 보면 으레 드는 생각이 있다. 저 사람들 가슴 속에 과연 진실이 들어있을까? 고도의 정치 테크닉으로 유연하게 정치에 임하는 선진국 정치인들이나 몸으로 맞붙어 막장 대결을 벌이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나 똑같이 드는 질문이다.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 복마전. 그러나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그들에게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현주소다. 이런 상황을 답답하게 여겨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픈 영화가 있다.

<스윙보트>(Swing Vote,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 코미디, 미국, 2008, 100)는 한 편의 잘 꾸며진 정치드라마다. 뉴멕시코 주 커리 카운티의 텍시코는 미국에서 한 번도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 공장에서 일하는 버드(케빈 코스트너)는 매사가 귀찮고 언제나 짜증 가득한 인물이다. 그를 못견뎌한 부인은 떠났고 어린 딸 몰리(메들린 케롤)는 사사건건 아빠를 간섭한다. 또한 평소에는 집에서 거지꼴을 하고 있다가 아동보호국 관리가 방문하면 갑자기 다정한 부녀 모습을 연출한다. 그처럼 인생이 무의미하게 돌아가던 버드에게 어느 날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에서 박빙의 상황이 펼쳐지던 중 어찌어찌해서 버드의 한 표가 대통령을 결정하는 사태가 터지고 만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한 상황이지만 아무튼 두 후보자는 버드의 한 표를 위해 멀리 텍시코까지 날아오고 유세전은 온 미국의 관심을 끌며 최고의 긴장상태로 치닫는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아마 눈치를 챌 것이다. 두 호보자의 추악한 이중적인 얼굴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사실 말이다.

공화당 후보이자 현 대통령인 앤드류(켈시 크레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버드에게 온갖 특전을 베풀어 안정된 취직자리를 약속하고 갖가지 선물을 안겨준다. 민주당 후보인 그린리프(데니스 호퍼)도 그에 질세라 자신도 버드처럼 낚시 광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친근한 인상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원래부터 줏대라곤 없는 버드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러다 급기야 버드 한사람만을 위한 정책대결의 장이 펼쳐진다.

 

감시와 견제

우리는 흔히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에 버금가는 인격까지 갖추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권력을 소중하게 다루어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할 책임 정도는 인식하고 있기를 바란다. 지도자의 자질을 윤리적으로 평가한 탓이다. 그런 까닭에 만일 그가 권력을 남용하면 인격에 파탄이 났거나 욕심이 지나쳐 본분을 망각했다고 분노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꿈에도 그리는 사심 없는 지도자!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는 그런 지도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그는 힘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인간의 본능이며 이를 통해 일종의 안정감을 부여받고 그 안정감을 발판으로 새로운 도전에 맞서는 힘이 주어진다고 했다. 자기 개발에 있어 권력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권력을 쥔 자가 그 힘을 한번쯤 사용해보고 싶은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면 지도자 개인에게 거는 윤리적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옳지 않을까?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은 쉽게 권력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상황을 통제하고 아랫사람을 맘대로 주무르며 조직의 미래까지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면 우쭐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아니, 스스로 신이 된 느낌으로까지 내몰릴 수 있다. 불행한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이상적인 지도자보다는 권력을 남용해 스스로 파멸의 길에 들어선 지도자가 훨씬 많다는 데 있다. 우선 생각나는 지도자로, 친구의 칼에 숨을 거둔 케사르, 끝까지 국민을 속이다 자신의 바닥까지 드러낸 닉슨, TV에서 공개처형 당하는 모습까지 방송된 차우체스크, 거지꼴로 잡혀 길거리에서 살해된 후세인 등등이 있다.

그런 까닭에 자격미달의 지도자를 추려내기 위해 임기를 제한하고 투표를 통해 대의를 묻고 언론의 힘으로 견제를 해보기도 한다. 토마스 홉스처럼 사회계약론자로 유명한 장 자끄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인간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상호 견제와 검열이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다음 영화에서는 권위적 지도자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더 퀸

역사적인 사건을 영화로 만들 때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한 편으로 정확한 고증을 통해 관객들에게 사실을 오도한다는 느낌을 주지 말아야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사건에 대한 적절한 해석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략)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등록자안숭범 사무총장

등록일2016-08-22

조회수3,126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