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영화의 세계성과 영화 비평의 전망
-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의 죽음을 거쳐
개인성의 복원을 통한 극복의 가능성으로 -
황혜진(목원대학교 영화영상학부 교수)
1. 세계성 혹은 국제성에 대하여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세계성’은 ‘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이며, ‘국제성’은 ‘여러 나라에 관계되는 성질’이다. 그런가 하면 'cosmopolitan'은 ‘세계인’ 혹은 ‘세계 공통의’로 국역되고 ‘internationalism'은 국제주의나 국제성으로 번역되는데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은 세계성이나 국제성과 같은 용어들이 현실적인 제반 관계들 속에서만 그 기의를 확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까이 나오끼는 국제성(internationalism)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나라(국민)가 분명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일 때, 그 나라에 귀속되어 있다는 믿음과 그러한 ’우리‘나라가 동시에 제국주의국가임을 자각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절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한 번도 제국주의 국가인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제국의 식민지였던 상처투성이의 기억을 갖고 있는, 현재에도 강대국의 의사결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국민으로서 이 질문은 이렇게 번역되어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귀속되어 있는 국가가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역사적․사회적 경험이 주체에게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제공했다면, 진정 한국의 대중 혹은 비평가가 주체적인 시각으로 세계성 혹은 국제성을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이 글은 세계성이나 국제성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비롯해 5개 부문상을 수상한 이후, 칸에서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얻어낸 이창동 영화를 논의하는 데 있어 ‘세계성’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세미나의 주제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러나 촌스럽게도 세계성이란 개념은 필자에게 다소의 부담, 즉 ‘과연 내가 세계성이라는 관점으로 이창동의 영화를 비평하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의문은 너무도 맥없이 풀렸다. 지금껏 받아왔던 제도권 내 교육이 서구적 근대를 이상적 목표로 하여 조율된 것이고 보면, 서구적 근대가 곧 보편이며 그에 가까운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탈근대나 해체주의 역시 서구적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 패러다임과 실천의 변화를 가져왔다기보다 자신들의 근대가 빚은 오류를 인식하고 이론화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하는 정도의 충격을 주는 데 그쳤다. 현실의 삶에서 근대는 여전히 유효하며 강력히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는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규범의 차원에서는 부분적으로 전통의 영향 아래 놓여 있지만 서구적 근대의 근거로서 보편적 이성을 이상화하는 관점에서 구성된 상징질서와 담론에 의해 주조된 존재일 터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창동의 영화가 보여주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비평해 낸다면 그것은 별다른 개념적 난관 없이 세계성과 연결될 듯도 하다. 물론 이 가설은 보편성이 이성의 빛 아래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주장할 때만 타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우리’ 혹은 필자에게 ‘세계성’은 어쩐지 세계화, 세계주의를 의미하는 globalism과 무관하게 인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첫 단락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연관된다. globalism에 대한 불편한 반응은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안녕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들의 세계 전략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두 번째 문단에서 쉽게 해결하고 넘어갔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필자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바, 제국으로부터의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서구화된 것으로서의 보편적 사고를 세계성의 지렛대로 사용해 상호배타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한, 투명한 비평적 언어를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렇듯 자명하게 드러나는 글쓰기의 한계 안에서 다소 머뭇거리며 말하자면, 필자가 언급할 수 있는 이창동 영화의 세계성은 서구 제국/들이 제출해 온 이론적 개념들과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영화 보기의 주체로서 필자가 갖고 있는 이념과 삶의 구체적 내용이 타협 가능한 공간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2. 타협적 독해의 지점들 : 개인/개인성, 일상/비일상
이창동의 영화는 <오아시스>(2002)를 시작으로 해외영화제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서구의 비평적 시선, 즉 세계성 혹은 서구적 이성의 시선이 공감하고 동의할 만한 무엇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후에도 <밀양>이 2007년 칸에서 여우주연상 외에 아시아 지역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의 찬사를 받았으며 다음 작품인 <시>는 2010년 칸 각본상 수상을 시작으로 서구와 비서구에 걸쳐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연이는 해외영화제 수상은 혹시라도 필자가 알지 못하는 ‘영화제 권력’과 같은 정치적 의도의 개입을 전제한다고 해도 이창동의 영화가 서구적 보편의 시선과 소통하는, 다시 말해 세계성을 선취한 약호/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두고 연대기적 분류나 트릴로지 등으로 명명해 통합하는 것은 다소 불편한 일이지만 <초록물고기>(1997)와 <박하사탕>(2002)을 한국적 콘텍스트가 강조된 초기작으로, <오아시스>와 <밀양>(2007), <시>(2010)를 세계성으로 번역해 부를 만한 보편성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한 작품군으로 나누어 볼 때, 두 그룹 사이의 연속과 단절을 드러낼 수 있는 준거로서 ‘개인’ 혹은 ‘개인성’의 개념을 제안해 볼 수 있다.
‘개인’ 역시 서구 근대 정신이 개념화한 틀로서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계기 속에서 전통의 관계망을 벗어나 자신의 사적인 목표와 욕망을 형성하고 관철시키고자 하는 존재로 칭할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로서 ‘개인성’을 소유할 수 있는데, 개인성은 생래적이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즉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상징질서나 담론 속으로 개인을 동일화시키고자 하는 개체화의 원리에 구속되지 않고, 주어진 상징질서와 담론을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개별성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고자 할 때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성’은 앞서 말했던 바, 서구가 제출한 이론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비서구의 입장에서 서구에 일방적으로 침윤되지 않는 모색의 공간을 열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창동 영화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개인성’이 발견되고 구성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과 ‘비일상’ 개념을 참조해 볼 있다. ‘일상’이란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매일의 삶, 억압적이지만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매혹의 체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현대성과 상통한다. 물질적인 풍요가 그 외피를 두르고 있는데 표면은 현상 이면의 존재를 망각시킴으로써 갈등과 모순을 은폐한다. 현대인의 삶이 유동하는 이러한 삶의 표면은 균열이 없는 매끄러운 공간이므로 여기서 펼쳐지는 일상 혹은 일상성은 더 이상의 비참이 없는 안전한 삶의 조건과 동의를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르페브르는 현대인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일상이란 “자유․이상 또는 개인적 해결에 맡겨진 영역이” 아니며 “자발적이고도 계획된 자동조절의 시간 및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일상과 그것이 구축한 일상성이 풍요롭지만 대단히 억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김용석이 제안한 ‘비일상’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의 현실적 토대인 일상을 인정하는 가운데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가짐으로써 일상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내면에 일정한 울림을 남김으로써 흔적을 남기는 대신 필요와 충족의 과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대체되는 일상에 감추어진 의미를 재발견함으로써 비일상이 성취되고 이 순간 비로소 개인성이 획득되어지는 것이다.
3.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의 회복 불가능한 유토피아
: 일상이 파괴한 개인성이 초래한 사태로서의 죽음
이창동은 초기작 두 편으로 리얼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매체의 특성상, 영화가 리얼리스틱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장르 경계를 넘나드는 <율리시즈>와 같은 작품,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같은 모순된 용어의 사용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사회에서 리얼리즘 영화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모순된 현실을 그려낸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개인적 정체성뿐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 환경으로서의 세계상의 모순을 손쉬운 화해를 통해 해결하려 들지 않는 영화! 코리언 뉴웨이브의 선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나 박광수의 영화에 보내진 상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주제와 인물, 서사가 배태된 환경으로서의 한국적 콘텍스트의 특수성은 감독의 세계관, 즉 해석의 달려 있으므로 문제는 비판적 시선으로 잡아낸 모순적 현실의 구체성으로서의 일상 혹은 그에 반응하는 인물의 행위, 나아가 결론이 지향하는 전망일 것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