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포함 르 몽드지에 실린 월요 시네마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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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5월 27일 김성욱 영화평론가가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 2024)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세 번째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제1회 월요시네마는 심영섭 피프레시 한국지부 13대 회장이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을, 제2회 월요시네마는 황영미 시네라쳐연구소장이 <오키쿠와 세계, 2024)를 발제했다.
-사회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본 협회에서 주관하는 ‘월요시네마’, 5월 월요시네마 여오하는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2024)입니다. 진행자가 아주 유명하신 김성욱 영화평론가십니다. 서울 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시고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영화 정말 많이 보신 분 중에 한 분이 김성욱 영화평론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진행을 하실지 대단히 궁금하고요. 그럼 발제 부탁드립니다.
-발제자: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김성욱입니다. 오늘,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 합니다. 이 작품이 아직 온라인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이라, 구체적인 장면들에 대해 세부적으로 다루지는 못하고,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세대적으로 보자면,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감독 중의 한 명으로 그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들 세대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영화의 새로운 잠재력에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극장을 하다보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영화관이라던가 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의 작업에서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회고전이 개최되어 카탈로그에 짧은 글을 쓰면서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아니지만, 로르바케르 영화의 영적인 측면들, 정신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좀 전에 제가 세대를 언급했는데, 참고로 로르바케르 감독은 1981년생입니다. 사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작가를 세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확립된 분류가 아닙니다. 이 세대의 작가를 예로 들자면 하마구치 류스케(1978), 쥐스틴 트리에(1978), 호나스 트루에바(1981), 기욤 브락(1977) 같은 감독들이 있습니다. 이들 세대는 디지털로 작업한 첫 번째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화 기술 분야에서 일어난 이 본질적인 변화가 영화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이들 작가들이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즐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필름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그중에서도 로르바케르 감독은 특히 필름 작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뷔작 <천상의 몸>부터 로르바케르는 모든 장편 영화를 슈퍼 16mm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이전까지 슈퍼 16mm 촬영이 꽤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과 류승완 감독의 <짝패>가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작업을 하는 감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필름 작업은 촬영 감독 엘렌 루바르와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선택이 디지털 세대에게는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왜 필름 작업을 계속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는데, 로르바케르는 예상치 못한 작은 놀라움을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예를 들어, 엘렌 루바르는 <행복한 라짜로>(2018) 촬영 중 일부 실내 및 야간 장면에서 이미지가 어둡고 노출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지만, 슈퍼 16mm 필름으로 촬영한 것은 ‘최종 결과물에 항상 작은 놀라움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르바케르는 데뷔작을 만들 때 모두가 디지털로 작업하라고 조언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디지털로 전달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디지털 작업의 효율성, 즉 많은 양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촬영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필름 작업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필름 작업이야말로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르가 말했듯이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좋은 것을 얻거나,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슈퍼 16mm 촬영은 디지털이라면 여러 번 기회를 가질 수 있고 현장에서 언제든 이미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예기치 않은 것들이 영화에 개입할 여지를 주게 됩니다. 이는 그녀의 말처럼 의도된 결과만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놀라움’을 영화에 도입할 수 있게 합니다.
에코 시네마와 양봉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까다로운 필름을 선택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실제로 제작 관행에서 지속 가능한 영화 제작을 선도하는 에코 시네마의 모범 사례로도 유명합니다. <행복한 라짜로>는 유럽 최초의 친환경 영화 프로토콜인 에코무비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는 농촌 사회의 붕괴와 현대성의 파괴, 자본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데, 이 주제는 느린 영화 제작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이미지의 정당성을 얻습니다. 모든 형태의 생명체가 항상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녀의 모든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천상의 몸>(2011)을 비롯한 그녀의 영화들은 모두 환경을 주제로 다룹니다.
에코 시네마와 관련해, 로르바케르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작업의 이상을 ‘양봉’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자유롭고 열심히 일하며 매우 중요한 동물인 꿀벌에 대해 강한 존경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꿀벌은 생태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꿀벌이 멸종하면 지구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꿀벌을 보호하는 것은 곧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므로, 로르바케르는 영화를 통해 모든 형태의 생명체가 서식하는 지구에 대한 생태적 양심과 존중을 자극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로르바케르의 두 번째 영화인 <더 원더스>(2014)는 양봉을 하는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981년 토스카나 시골의 작은 마을 피에솔레에서 태어난 앨리스 로르바케르의 아버지는 실제로 양봉업을 하며 유기농 라임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로르바케르는 양봉이 통제할 수 없는 벌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영화 작업 또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촬영할 수 없다. 한계에 대한 자각은 그러나 반대로 무언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이미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촬영은 신성한 작업이 됩니다.
유산과 폐허의 상상
필름 작업은 영화의 고유한 역사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녀의 신작 <키메라>가 그런 점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는 도굴꾼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보여드리는 사진처럼, 인물들이 방치된 기차역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이탈리아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시골 풍경의 고풍스러운 매력은 과거 위대한 이탈리아 영화 감독들의 작품과 영화의 우화적 차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페데리코 펠리니, 타비아니 형제, 그리고 특히 에르마노 올미와 파솔리니의 영화들이 그러합니다. 소박한 민속적 스토리텔링, 시간 여행을 통한 마술적 리얼리즘, 사실에서 영감을 받은 사회 드라마, 삶의 불확실성을 겪는 시골 사람들, 비전문 배우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믿음 등, 이 모든 것이 네오리얼리즘의 유산입니다.
대체로 ‘전통’이나 ‘유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기피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로르바케르 영화의 매력은 그녀의 작품 안에 새로움과 오래된 것들의 유산이 공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라진 과거와 그것의 새로운 방식의 생존 및 재활성화가 로르바케르 영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지금 언급하려는 장면에서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낡고 오래된 기차역에서 대화는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연기하는 플로라의 말로 시작됩니다. 그녀는 딸 베니아미나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즐겼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방치된 역을 보고 플로라에게 이 역은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플로라는 공공 건물이라 모두의 것이라고, 버려진 역이라고 답합니다. 나중에 주인공 아르투가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하는데, 그때 상황이 변해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버려진 역을 개조해 아이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아르투에게 말합니다.
이 기차역의 이름이 리파벨라인데, 토스카나 지역에 실제로 있는 역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리페어 뷰티', 즉 '아름다움을 수리하다', '복원된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기차가 운행을 멈춘 역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기능을 멈춘 역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기능을 멈춘 역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이상한 비교일 수 있지만, 저는 이 기차역 장면이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피터 포크가 폐허가 된 베를린 거리를 걷다가 안할터 역의 빈터를 배회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천사 다미엘과 접촉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그 역입니다. 피터 포크는 안할터 반호프를 기차가 멈춘 역일 뿐만 아니라, 역 자체가 멈춘 역이라고 말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건축적 다큐멘트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는 명백하게 애도의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참조점에서 보자면, '폐허의 풍경'과 상상을 포함합니다. 폐허의 텅 빈 공간은 과도한 건축 공간에서 시각적인 일시정지 상태를 불러오는 장소입니다. 빈터와 공터는 공간 속의 여백이자, 시간 속의 여백입니다.
빔 벤더스의 <도시의 앨리스>에서 빈터와 앨리스가 앨리스의 할머니 집을 찾아 루르 지구를 차로 이동할 때, 앨리스가 버려진 집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름다운 오래된 집들이 허물어질 것 같아 슬퍼. 마치 빈 공간들이 무덤 같아. 집이 죽은 무덤이야." 이 애절한 은유는 텅 빈 공간을 과거를 간직한 기념물, 즉 박물관처럼 제시합니다. 마찬가지로, 리파벨라 역도 기능을 멈춘 무덤 같은 빈 공간이지만, 과거의 시간을 간직한 일종의 박물관 같은 곳입니다. 요점은 하나의 공간이 그 기능을 달리해 다른 가능성을 지닌 공간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아르투가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변화입니다. 버려진 리파벨라 역은 이탈리아와 다른 사람들이 작은 여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방치된 공간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살고 일하는 공동체 공간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유토피아적인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이중적인 사이 공간이기도 합니다. 플로라의 말처럼, 도시와 시골 사이의 장소이며, 이 둘을 연결하는 역이 있던 곳입니다. 동시에 많은 여행자들이 만나고 통과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플로라가 이 역에서 딸을 떠올리며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탈리아는 반대로 이 버려진 역에서 미래의 발견을 떠올립니다.
이탈리아의 행위는 과거의 유물을 발굴하여 개인 소유로 만들어 판매하는 아르투의 행동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두 가지의 발굴 행위, 즉 과거 유산에 대한 두 가지 태도와 미래적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아르투의 도굴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로르바케르 감독이 더 주목했던 것이 이탈리아가 버려진 역을 개조하는 데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두 기차역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의 비전이 이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의 흥미로움은 버려진 물건들이나 과거의 유물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활용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화에서 강조된 대로,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에게 속한" 공동 소유의 장소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물건들의 재활용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유산'이라고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행동은 말씀드린 것처럼 유물 도굴꾼인 아르투의 행동과 대조적입니다. 로르바케르는 이 역의 변화를 통해 '유산'의 사적 소유와 공유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산'이라는 말로 저는 로르바케르의 영화가 '이탈리아 영화 유산'을 재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네오리얼리즘 이후 이탈리아 영화를 새롭게 부활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거에 사라졌던 이탈리아 영화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며, 이를 통해 영화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로르바케르 영화의 흥미로운 또 다른 점입니다.
발굴과 매장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몇 가지 점만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키메라>는 이런 유산의 ‘발굴’이 두드러진 영화입니다. 발굴 행위는 죽은 자의 세계에 있었던 어떤 것을 산 자의 세계 안으로 이렇게 끌어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이 영화에서 뭔가 신비롭거나 매력적인 지점인데, 그럼으로 해서 영화가 이질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불확실한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땅을 파서 깊숙이 매장되어 있던 그 무언가를 끌어오는 발굴 작업은 불가피하게 어두운 지대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 어두운 지대라는 건 대체로 터널이라든가 아니면 동굴이라든가 이런 것들인데요, 사실 이 행위가 앞서 말씀드린 영화의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들이 있습니다.
시간상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오멜리아 콘타디나>라는 짧은 단편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발굴이 아니라 오히려 땅에 묻는 행위를 다룹니다. JR과의 협업으로, 농민의 죽음에 대한 장례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며, 로르바케르 영화의 핵심 주제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묻었지만 우리가 씨앗인 줄은 몰랐다"라는 대사입니다. 장례식은 농민들에게 부활을 축하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도시적인 것과는 다르며, 농민들에게 땅에 묻는 것은 일종의 파종 행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죽음을 매장하는 행위가 단순히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다른 것이 발생하기를 기대하는 행위임을 나타냅니다. 한 농민의 죽음 이후에 정치적인 저항에 대한 새로운 씨앗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는 직접적인 정치적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함축적으로 정치적 주제들을 제기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보면, <키메라>에서 시골을 배회하며 암시장에 팔기 위해 묻힌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유물을 훔치는 도굴꾼 아르투는 죽은 자의 장소에 민감한 감각을 가진 이로, 수맥 탐지봉을 사용하여 고대 무덤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이는 어두운 땅속 지하에 몇 세기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는 영화의 가시성 이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키메라>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현실로 끌어내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는 로르바케르 영화의 서막을 장식합니다. 그녀의 영화는 대개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작하며, 이는 밤의 어둠을 밝혀가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가져오는 순간이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암시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밤에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어둠에 가려진 것을 상상으로 본 경험을 언급하곤 합니다. 이는 그녀의 영화 작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어두운 동굴에서 빛을 비추며 관객을 안내하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말씀 드린대로 어둠 속에 빛을 가져오는 순간은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르바케르는 동굴을 탐험하며 만든 친구들의 슈퍼 16미리 필름을 보았던 일을 회상하며 빛이 동굴에 생명을 불어넣어 종유석을 볼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동굴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빛의 실타래
어둠을 통과하고, 그 안에 빛을 비추는 행위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극장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관의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극장에 들어서면 불이 꺼지고 프로젝터의 빛이 스크린에 비추어집니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어둠의 공간과 벽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이 두가지가 영화의 성립 조건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르바케르의 영화와 이미지도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빛을 비추면서 시작합니다. 요지는 이러한 어둠 속의 은 빛이 영화 매체의 가능성과 위험성, 그리고 환경에 내재된 해로운 영향에 대한 일종의 자기반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제작은 창조적인 과정이지만, 때론 파괴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조심스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키메라>에서 아르투가 기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순간이 그러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어지는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영화의 끝에 도달해서야 이 빛의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지만, 초반의 빛과 그림자가 어울린 장면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반짝거리는 빛과 창문 사이를 통과하는 빛이 돋보입니다. 아르투는 회상하는 과거의 이미지와 함께, 여자가 "빛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또한 떠올립니다. 이 장면은 영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몽환적이거나 반쯤 잠들어 있는 순간에 듣는 빛과 소리들은 영화의 원형적인 순간을 상징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관의 어둠 이전에 황혼녘의 몽상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을 언급한 바 있는데, 바로 그런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키메라>에서 아르투의 발굴 작업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이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행위로도 이해됩니다.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아르투는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그를 다시 어둠의 바깥으로 이끄는 것은 붉은 색의 줄입니다. 이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비슷한 구제의 실로, 크레타섬의 어두운 미로를 헤매지 않고 탈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영화 후반부에 동굴에 갇힌 아르투에게 이 붉은 실이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은 빛의 실타래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빛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말이 반복해 나오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붉은 실이 동굴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르투가 바깥 세계로 나오게 해주는 빛이기도 합니다. 이 빛의 실타래는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빛의 투사와도 유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나면서 영화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놀라운 기적적인 순간은 실은 우리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평범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Q1. 사회자: 제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할까 합니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 연출 기법 중에 하나가 저는 롤샷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의 핵심 이미지 중에 하나가 거꾸로 서 있는 사내라는 생각을 했고 그 거꾸로 서 있는 사내는 결국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고 또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고 또 신화와 현실을 연결하는 그런 식의 중요한 미장센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제로 360도 롤샷을 통해서 표현합니다. CF에서 활용되는 감각적이고 화려한 그런 롤샷이 이 영화에서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도굴꾼이 도굴한 것을 다시 땅에 묻는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 두 개가 거꾸로 서 있은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롤 샷에 대해서 어떻게 봤는지 궁금합니다.
발제자: 말씀하신 게 거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고요. 어떻게 보면 거꾸로 선 이미지인데 사실 거꾸로 서 있다라는 게 중요성은 아닌 것 같고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산 자 죽은 자 혹은 매장되어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연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이 이미지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선 이미지는 포스터, 혹은 타로카드의 이미지이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활용된 것은 그런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한 바퀴를 이렇게 빙 도는 것이기에 그래서 정적인 이미지로 봤을 때는 거꾸로 쓴 이미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의 장면에서 봤을 때는 연결의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꾸로 선 이미지는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데, 나중에는 더블의 느낌도 있습니다. 더블이라는 건 영화를 거꾸로 썼다라는 것만이 아니라 더블의 느낌이죠. 이를테면, 물에 비친 아르투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그런 장면들이 다 말씀하신 장면들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2. 참가자 1: 아무리 생각해도 베니아미나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