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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부천 세미나)임권택 영화에 나타난 동양화론과 진경산수이미지 그리고 몽타주와 관련성 - 문학산 / 토론자 : 강성률

임권택 영화에 나타난 동양화론과 진경산수이미지
그리고 몽타주와 관련성
                                   문학산 (영화평론가, 부산대 교수)


1. 임권택의 한국에 대한 자각과 영화적 실천
  임권택 영화의 예술적 자궁은 한국이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임권택 영화의 샘물이며 미학적 거점이다. 한국에 대한 자각은 한국의 소리를 다루는 <서편제>에서 한국화단의 대표적인 인물의 궤적을 다루는 <취화선>에서 한지 제작과정과 가치를 역설한 <달빛 길어올리기>에 이른다. 임권택의 한국주의로 명명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자각과 뿌리 깊은 한국영화사의 담론에 대한 호응이라는 두 갈래에 맞닿아 있다.
  개인적인 관심은 1974년 대만 영화제 방문 여행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만 여행을 위해 한국을 떠나면서 “나는 그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다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효인 편저, 한국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5. 50쪽.
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서러운 삶의 체험과 함께 처절한 삶을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삶을 보듬어 보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영화다>” 이효인 편저, 앞의 책, 50쪽.
고 영화론을 피력하였다. 임권택의 영화론은 한국에 살고있는 인물의 삶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요약되며 이는 일본에서 연설을 통해 ‘제 영화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것’으로 재천명되었다. 또한 다른 인터뷰에서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반복해서 피력하여 한국의 자신의 영화의 원형질임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임권택 감독은 “내 영화들에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비극에서 발견한 것, 이 비극의 원인, 우리 삶의 장애물들, 왜 우리가 이런 장애들을 지니고 있는지 등등 한국인의 삶을 형상화하려고 시도”했으며 동시에 “우리는 미국영화들처럼 재미있는 영화들을 만들 수 없으므로 우리 영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이들은 말할 수 없는 우리 이야기에 기초한 영화들을 만들어야합니다.” 서인숙, 한국영화미학 탐구 Ⅰ: 임권택 영화, 식민지주의 문화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연구제 23호, 2004. 242쪽.
고 역설하였다. 한국인 삶의 형상화와 한국 문화에 기반 한 영화 만들기는 우리 영화의 존중 받기 위한 것과 산업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자국 영화의 자생력 갖기로 귀결된다.
 서인숙은 이와 같은 임권택의 연출의지는 ‘과거와 역사에 집착하는 영화’로 이끌었으며 “‘우리’가 잘 할 수 있지만 ‘그들’(서구)이 얘기할 수 없는 ‘차이’를 기반으로 한, 민족 내러티브로 선택된 유교적 전통은 임감독 전 작품들을 관통하며 한국 고유의 미덕”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유교적 전통은 한국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적 관습 기반으로 작동되며 보다 원형적인 문제는 한국의 자연과 한국의 인물을 어떻게 포착하여 제시하느냐에 맞추어져 있다.
 임권택의 한국문화와 풍경 재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임권택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던 데이비드 제임슨의 시각이다. 민족예술영화에 임권택의 작품을 범주화한 다음 할리우드 영화언어의 해체와 다른 두 가지 준거틀에 위치 지웠다. 첫 번째 준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며 두 번째는 식민지 경험 이전의 토속적 문화 습속 중에서 영화 언어를 찾는 것이다. 임권택은 후자에 속하며 “한국의 근대성과 식민지 이전의 민족문화 사이의 타협점을 찾는 것” 김경현․데이비드 E 제임스 외 엮음, 김희진 옮김, 임권택 , 민족영화 만들기, 한울, 59쪽. 주유신은 다른 맥락에서 임권택의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주된 기조는 ‘민족의 고통과 비극을 육체적으로 훼손되고 정신적으로 모욕당한 여성에게 투사하여 알레고리화하는 동시에 그들을 구원하고 보상해주는 주체를 남성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이다.(주유신, 임권택 영화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민족미학 비판, 대중서사연구 제 13집, 2005.6.30)  여성의 수난 서사에 대해 임권택은 ”전쟁같은 외부적 수난을 겼을 때도 여성은 남성보다 이중 삼중으로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지 않습니까…….(중략)…….남성보다도 더 불행한 입장에 있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더 극명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다“는 연출 의도를 피력하였다.( 임권택. 유지나, 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행, 민음사. 2007. 169-170쪽.)
이 그가 선택한 방법으로 단정하였다. 이와같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자국의 풍경은 이국적 볼거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진다. 데이비드 제임스는 ‘한국 풍경의 이상화는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중층결정된 경험을 가진 국내의 관객들을 위한 것이며 농촌사회를 휴양과 정신적 회생의 장소’ 재배치하였으며 “영화라는 문화관광주의가 전지구적 관광산업의 정치학과 힘을 합쳐 외국관객들을 유혹하는데, 이는 자연풍광의 매춘화에 다름 아니며 한국은 국제적 시선을 끌기 위해 애쓸 때 마다 노골적으로 이를 활용해왔다 김경현 외, 위의 책, 67쪽.
”고 폄하하였다. 임권택의 한국풍경이 외국관객을 유혹하려는 영화를 통한 관광 홍보물일 수도 있다는 평가는 재고해 볼 부분이 존재한다. 임권택의 한국주의는 문화관광 상품주의의 소산도 아니며 외국 영화제에서 평가 받으려는 엑조티즘(exotism) 의 산물은 더욱 아닐 것이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해야하는가. 이를 위해 가벼운 미학적 해명과 감독의 개인사와 영화사적 담론에서 살펴보기 그리고 한국의 진경산수와 접맥을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예술작품이 작품으로 열린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존재 속에 밝게 개시됨으로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의 -작품-속으로의 -자기-정립” 하이데거 저, 오병남․ 민형원 공역, 예술작품의 근원, 예전사. 1996. 41쪽.
이라고 간명하게 규정하였다. 예술은 소리는 울림 속으로 되돌아가고, 돌은 돌의 묵직함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스스로를 자기정립하고 드러낸다. 한국의 영화도 한국인의 심성, 한국의 풍경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이야기를 드러낼 때 한국영화의 본질과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진리처럼 밝게 드러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의 풍경을 카메라가 사실에 가깝게 포착해내는 것은 서구의 시선에서 이국적인 낯선 곳을 광고하기보다는 한국의 심성과 서사를 배치하여 한국의 예술로써 영화를 자기정립하게 하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포착해낸 느린 인물의 움직임과 직선과 구불구불한 길은 한국의 풍경이라는 존재자를 탈은폐시킨다. 카메라로 끄집어내진 한국의 풍경은 바로 한국영화에 부합한 한국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며 모호한 것이 명료하게 밝혀진 것이다. 예술의 본질이 진리를 작품 속으로 정립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자연과 문화와 풍경이 한국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미장센으로 배치되는 것은 예술의 기본이자 본령에 속한 것이다. 임권택 영화의 특징은 한국 풍경의 이상화라기보다는 은폐된 한국풍경을 적극적으로 탈은폐하는 작가적 노력과 그 흔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임권택 영화의 프레임은 은폐된 한국전통문화를 견인하여 거대한 모자이크화를 만들어낸다. 모자이크화는 이국적 볼거리로 전시되거나 문화적 호객 행위가 아닌 자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그리고 무한한 자긍심의 산물에 가깝다.      
 임권택 감독의 한국 문화와 한국적 삶에 대한 관심은 한국영화사적 맥락에서 볼 때 1930년대 로컬 담론에서도 제기되었으며 1970년대에도 다시 소환된 담론이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영화 감독인 나운규는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共通된 感性을 잘 붙잡아서 조선의 山河와 조선의 情調를 基調로 하고 만들어낸다면 나는 반드시 世界市場 進出이 어렵지 않을 줄 알어요”  좌담, <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 <<삼천리>>, 1936년 11월호. 98쪽. 강성률, 1930년대 로칼 담론 연구, 영화연구, 제 33호. 243쪽. 재인용.
라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로칼 칼라 영화의 필요성은 대부분 조선에 대한 강조로 귀결되며 이는 자국의 시장에서 세계 시장으로 확장하여 조선 영화의 산업적 활로를 찾으려는 자구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강성률은 “제작자와 감독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뀐 상황에서 과다한 제작비를 상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로칼 칼라의 영화를 주장하면서 실제 그런 영화를 제작” 강성률, 위의  논문, 247쪽.
했다고 결론지었다. 1930년대 로칼 칼라의 주창은 자국영화의 산업적 자생력과 경쟁력 갖추기라는 산업적 맥락에서 도출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카프의 해산과 한국영화 산업의 위축과 친일 영화가 제작되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는 검열의 부담과 현실 비판적 영화 제작의 실패로 인한 반대 급부로 부상한 조선적인 정조와 조선의 풍경이라는 스펙터클의 영화적 수용으로 귀결된다. 로칼 칼라로 이름 붙여진 조선의 풍경과 정조는 조선의 현실을 일부 거세하고 조선의 스펙터클만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의 기우뚱한 영화적 타협이거나 산업적 재건을 명분으로 한 우리 것의 호명으로 볼 수 있다. 이는 1970년대 유신체제기에서 다시 담론으로 귀환하면서 산업적 요구와 정부 정책에 대한 소극적 수용이라는 물밑에서 타협적 균형을 찾기로 재론된다. 임권택 감독은 대만 여행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유신체제기에 영화진흥공사에서 지원한 반공영화 <증언>과 새마을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을 제작한 이력은 영화제작을 위한 순응적 자세를 엿보게 한다.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창작의 모태가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모국의 문화적 토양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국책영화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지닌 점을 염두에 둘 때 국내 시장과 해외에서 평가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창작자로서 고뇌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한국이라는 창조의 토대를 예술가의 감수성으로 체득했다면 우리 문화를 잘 알 릴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정책적 권장에 대한 고려 그리고  해외 영화제와 시장에서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부문으로서 우리 문화와 우리 것에 대한 소환이 삼각형을 이루어 임권택의 한국적 소재의 영화 제작으로 귀결된 셈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는 담론이 세계화를 주장한 김영삼 정부에서 거듭 주창되었다. 문민의 정부 시절 1994년 시드니에서 국정핵심목표로 세계화를 주창하였다. 세계화는 민족의 생존 전략이며 발전 계획임을 천명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모든 부문의 국제적 경쟁력 강화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이를 위한 전 국민의 동원” 이인화, 세계화시대 민족국가 및 민족주의 담론에 관한 연구, 서강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64쪽.
을 의도하였다. 세계화가 김영삼 개혁 정책에 대한 보수언론과 대기업의 방어 이데올로기였다 하더라도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국가주도의 민족주의로 호명되면서 문화영역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화의 부문에서  영화의 경쟁력 강화 일환으로 우리 것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적 담론이 주창된다.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민족성과 세계성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국민감독 임권택의 한국소재의 영화를 주목받게 하였을 것이다. 임권택은 자국 문화에 대한 영화적 관심을 오랫동안 기울여왔으며 <만다라>를 통해 한국 불교를 천착하였으며 <씨받이>를 통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폐해인 남아선호사상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1993년 <서편제>의 제작과 산업적 성공은 세계화를 표방하는 당시의 국정핵심 과제에 부합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판소리라는 우리 소리(민족)를 세계화 시대에 동원하는 가능성의 상징으로 부각시켜 ‘세계화시대에 호명되는 민족 문화에 대한 활성화’를 실천하는 예술가로 자리매김된다. 임권택 감독은 개인적인 성찰을 통해 1980년대부터 한국문화에 대한 천착을 시작하여 국내에서 국민감독으로 부상되었으며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다.  그의 브랜드는 한국 문화의 영화화였으며 이는 임권택의 한국주의로 명명되기도 했다. 임권택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성찰에서 촉발되어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문민정부시대에는 세계화라는 국가 핵심 과제에 부응하여 새삼스럽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국민감독의 지위를 확보하고 다른 장르 영화와 차별화된 작가 임권택의 산업적 성공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국외에서는 한국문화의 영화적 재현을 통해 해외영화제 수상을 통한 작가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어 작가적 위상과 예술영화의 배급망을 통한 산업적 활로도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임권택이 영화로 소환한 한국문화는 <만다라>를 통한 한국 불교, <씨받이>를 통한 한국의 남아선호와 유교적 가부장제도, <아다다>를 통한 과거 신분사회의 폐해, <서편제>를 통한 한국의 소리,  <태백 산맥>을 통한 한국 전쟁, 그리고 <취화선>을 통한 한국화로 이어진다.  임권택 감독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을 프레임에 담아내어 국민감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임권택 영화는 한국이라는 창조적 자궁에서 배태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이라는 상상의 이미지는 한국인이라는 인물이 살아서 움직이는 공간으로서 한국의 풍경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완성된다. 임권택의 프레임에 배치된 한국의 풍경은 이미지를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는 동양화의 전신사조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특히 자연 이미지와 인물의 정서와 관련성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전신사조는 조선 후기 진경 시대를 이끌었던 진경산수의 화법에 일정한 예술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 임권택은 한국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필생의 화두를 풀어내면서 전신론적 사실주의와 진경산수화가 보여준 심원법(深遠法)을 통한 한국풍경 드러내기로 실천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적 소재와 풍경은 한국의 진경산수미학과 접맥되면서 한국 풍경의 프레임을 통한 해외에서의 평가와 작가로서 독창성을 견인해낸다. 전신사조라는 동양화론과 심원법이 임권택의 영화에 어떻게 구체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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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안숭범 사무총장

등록일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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